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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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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바로사 작전]]과 비교 분석 == [[독소전쟁]]의 시작인 [[바르바로사 작전]]은 낫질 작전과 매우 닮아서 규모와 몇몇 세세한 차이점만 빼면 본질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소련은 프랑스보다 훨씬 큰 영토를 지니고 있었고, 국력도 프랑스보다 체급이 컸으며 무엇보다 초전의 숱한 패배에 후퇴를 계속 거듭하면서도 프랑스와는 달리 전의를 상실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웠다. 프랑스가 전의를 상실한 큰 이유 중 하나는 수도를 조기에 적의 수중에 넘어가 버린 탓이 컸다. 사실 프랑스도 오늘날에도 유럽에서 본토가 3번째로 넓은 국가로 지구전을 치르기에 충분히 큰 공간을 지녔다.[* 본토만 기준으로 한다면 프랑스는 저 시점에서 국토의 절반 가까이를 독일에게 점령당한 후였으며, 비슷하게 국토의 절반 이상이 점령당했던 [[6.25 전쟁|한국 전쟁]]과는 다르게 뒹케르크 철수 작전으로 외부에서 올 지원군도, 타개 할 작전도 없었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국경부터 파리까지의 거리, 즉 [[군사학]] 용어로서의 '종심'이 소련에 비해 훨씬 짧았던 터라 발전한 기동전에 1차대전 때와는 달리 차단조차 하지 못하고 빠르게 주력부대가 포위되어 버린다. 또한 파리 및 근교에 거주하던 시민들이 매우 많았으며, 국군의 붕괴를 실시간으로 목격한 프랑스 정부와 국민으로 하여금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영국도 자국 방어에 급급했기에 [[미국|그 외 나라]]의 지원을 받기가 요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소련은 프랑스와는 달랐다.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는 독일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만약 모스크바 전투에 패하고 모스크바가 독일에게 넘어갔다면 소련도 프랑스의 전철을 밟을 확률이 높았다. 오히려 소련은 파리보다도 각종 물자 생산원 및 철도시설이 모스크바에 집중되어 있어 만약 점령되면 심리적 효과뿐 아니라 실질적 전력도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는 판국이었다.] 스탈린도 모스크바에서 떠나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독일군이 모스크바에서 30km 떨어져 있는 [[힘키]]에 도착했던 순간에도 스탈린과 소련 수뇌부는 크렘린 궁을 지키고 있었다. 이러한 점이 결합되어 프랑스 침공때 보다 훨씬 더 경이로운 전공을 세우면서 소련의 영토 깊숙히 진입한 독일군은 긴 종심과 기동전 특유의 약점인 기동 부대와 후속 부대간의 간격 사이를 위협하는 소련군을 정리하는 데 시간을 보내야했고 소련군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나머지 월동장비를 갖추지도 않아 전쟁이 겨울까지 넘어가게 되자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 주저앉고 만다.][* 다만 유사시를 대비해 대부분의 정부 기관은 후방의 [[사마라(러시아)|쿠이비셰프]]로 옮겼다.] 또한 독일군은 유럽 문명을 보호하기 위해 유대 - 볼셰비즘의 본산인 소련을 멸망시키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아인자츠그루펜을 동원한 잔혹한 학살을 펼치며 러시아인뿐만 아니라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소련의 소수민족 지역에서 생존을 위해 독일군에게 맞서 싸울 유인을 제공해 버렸다. 독일군의 잔혹한 학살은 독일군을 해방자로 환영해주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내부 반 소련 세력이 독일에게 등을 돌리는 결과를 일으켰던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전선은 그렇지 않았다. 막심 베이강과 필피프 페탱이 받아들인 것처럼 독일의 전쟁은 전멸전이 아닌 전형적인 유럽식 전쟁이었다. 독일군은 프랑스 침공 기간 동안 베네룩스 3국과 프랑스에 무차별 폭격을 날리긴 했지만, 전반적인 군기를 유지하며 1차 세계대전 때 독일 제국군이 자행한 '벨기에의 강간' 같은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1차 세계대전 때와 같은 독일에 대한 증오심보다는 전쟁에 대한 공포가 더 각인되어 있던 프랑스인들은 믿고 있던 우방이 자신을 져버리고, 주력군이 전멸한 상황에서 항복을 결정했다. 이는 결국, 전시에 프 · 소 양국의 전쟁에 영향을 미치던 여러 요소들이 국가의 전쟁 수행 동력을 어떻게 결정지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독일군 쪽으로 시선을 옮겨본다면 프랑스 침공과 바르바로사 작전 시기의 독일군은 서로 전혀 다른 심리 상태에서 작전을 준비했다. 프랑스 침공 시기의 독일군은 굉장히 신중하고 전면전을 되도록 피하려 했으며 할더를 비롯한 일부 장성들은 가망이 없다며 히틀러를 죽이려고 들었다. 하지만 바르바로사 작전 시기의 독일군은 병사들부터 가장 냉정해야 할 OKH 작전 참모부까지 하나같이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탄넨베르크에서 자신들이 압살해버린 러시아 제국군을 생각하며 4개월이면 소련을 항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작전 준비를 마쳤다. 42년까지 독일군은 소련을 압도하며 크렘린에 칼끝을 들이밀었지만, 러시아의 양대 수도를 함락시키지 못해 소련을 끝장내지 못했고 내부적인 문제를 겪기 시작했다. 예컨대, 독일군은 표준궤가 아닌 광궤를 쓰는 소련의 철도 환경에 적응하느라 군수 보급에 일시적인 차질을 빚었다. 전선은 넓어지고, 보급선은 길어지는 판국인데 점령지의 경제력과 인프라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독일군은 차량과 말, 항공기까지 써가며 보급을 했지만, 겨울에는 폭설, 봄에는 라스푸티차로 애를 먹었다. 결국, 전선의 독일군은 점점 보급난을 겪으며 공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전선의 집중도 역시 크게 차이가 났는데 프랑스 침공을 위해 독일군은 전투가 한창이던 노르웨이에서 공수사단을 비롯한 정예사단을 차출하는 등[* 이때 독일군이 정예사단을 차출하면서 나르비크의 독일군 방어선이 약화되었고 클로드 오킨렉의 영국군과 노르웨이군은 반격을 가해 5월 27일 독일군을 몰아내고 나르비크를 탈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를 바탕으로한 영화가 2022년 12월 25일 개봉한 '나르비크'이다.] 자신들의 주 전선이 어디인가를 명확히 구분하고 보조 전선의 경우 전선을 지탱할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전력만 유지했다. 하지만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군은 서쪽으로 영국 해협에서는 항공전을, 대서양에서는 U보트를 활용한 통상 파괴작전을 벌이고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에서 8만에 가까운 병력을 운영하고 있었다. 즉 독일은 자신들 체급 이상의 소련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사실상 3면 전선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독일군 측면에서 바라보면 독일이 프랑스 때와 달리 소련을 지나치게 쉽게 보고 준비를 허술하게 했다가 자멸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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